Ch. 1 / 6
증언 아카이브 · TESTIMONY ARCHIVE Vol. 01 · 2026

계엄령.quest

계엄령을 살아낸 보통 사람들의 여섯 가지 이야기

Six chapters tracing what martial law meant for ordinary lives — gathered from oral histories, handwritten letters, and conversations recorded across three decades.

제 1 장

밤 열한 시, 라디오에서

서울 · 1979년 10월

계엄령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라디오에서였다. 김선자 씨(당시 22세, 봉제공장 노동자)는 그날 밤의 공기를 지금도 정확히 기억한다. 텔레비전이 없는 단칸방, 손때 묻은 트랜지스터 라디오, 그리고 갑자기 끊겨버린 음악 방송.

1979년 10월 27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발령된 비상계엄은, 김 씨에게 정치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단절로 다가왔다. 다음 날 출근길의 검문, 야간 통행금지의 부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군가들. 그녀는 그것을 “시간이 갑자기 무거워진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라디오에서 노래가 끊기더니, 누가 죽었다는 말이 나왔어요. 그리고 계엄령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처음엔 몰랐어요. 사장님이 다음 날 아침에 그러더라고. ‘이제 너희들 밤에 못 다닌다.’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계엄령은 그거였어요. 밤에 못 다니는 거.”

김선자 봉제공장 노동자, 당시 22세 · 2019년 구술 채록

그녀의 증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는 “모름”이다. 무엇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왜 통행금지가 시작되었는지 모르고,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 정보의 부재는 권력의 형식 그 자체였고, 김 씨가 살던 동네에서는 라디오 한 대가 곧 공적 정보의 전부였다.

역사학자 이정희 교수는 이 시기를 “집단적 모름의 시간”이라 부른다. 계엄은 단지 군사적 통제가 아니라, 시민이 자신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 자체를 일시적으로 회수하는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제 2 장

광주에서 온 편지

광주 · 1980년 5월

박명수 씨(당시 17세, 고등학생)의 가방에는 부치지 못한 편지가 한 통 들어 있었다. 1980년 5월 19일에 쓴 것이었고, 받는 사람은 군 복무 중이던 그의 형이었다.

편지에는 학교가 휴교령으로 닫혔다는 소식, 학생들이 시내로 나갔다는 소식, 그리고 “형, 나는 무섭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는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박 씨는 그 편지를 결국 부치지 못한 채 30년 넘게 책상 서랍에 보관했다.

“편지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는데 문이 닫혀 있었어요. 그게 전부예요. 너무 평범한 이유로 부치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 편지를 다시 펴 본 게 2010년이었거든요. 30년이 지난 거예요. 그동안 한 번도 못 펴봤어요. 펴 보면 그때의 내가 너무 또렷해서, 그게 무서웠던 것 같아요.”

박명수 전직 교사, 당시 고등학생 · 2014년 서면 기록

이 편지는 후에 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에 기증되었고, 5월 19일이라는 날짜가 박힌 봉투 채로 전시되어 있다. 박 씨는 “편지는 내가 쓴 것이지만, 이제 내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사적 문서가 공적 기록이 되는 과정 자체가, 그에게는 1980년 5월의 의미를 새롭게 묻게 했다.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형, 봄인데 시내에 꽃이 안 보여.” 박 씨는 그 한 줄이 지금도 자신을 가장 아프게 한다고 했다.

제 3 장

시장 좌판의 여섯 시간

대구 · 1980년 5월

정복순 씨(당시 41세, 시장 상인)는 계엄령을 “좌판이 비어 있던 여섯 시간”으로 기억한다. 그녀는 대구 칠성시장에서 채소 좌판을 운영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점으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을 때, 새벽 시장에 나간 상인들은 군인들의 검문에 막혔다. 정 씨는 그날 새벽 네 시 반에 시장에 도착했지만, 좌판을 펼 수 없었다.

“그날 시금치를 한 다발 묶다가 그냥 다시 풀었어요. 군인이 와서 ‘아주머니 오늘 장사 안 됩니다’ 그러더라고요. 화도 안 났어요. 화낼 사람이 없잖아요. 그날 우리 다섯 식구가 시금치 데친 거랑 보리밥 먹었어요. 그게 계엄령이에요. 시금치 데친 거. 그날만 그런 게 아니고, 한참을.”

정복순 시장 상인, 당시 41세 · 2017년 구술 채록

정 씨의 증언이 보여주는 것은, 계엄이 거대한 사건으로만 경험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가계부의 빈 칸으로, 데친 시금치로, 풀려버린 시금치 다발로 기록된다. 사회학자 윤기영은 이를 “일상화된 비상사태의 미시 경제”라고 분석한다.

여섯 시간 후, 시장은 다시 열렸다. 그러나 정 씨는 그날 이후로 “언제든 닫힐 수 있다”는 감각을 잃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트라우마라기보다, 일종의 학습된 신중함이었다.

제 4 장

병원 복도, 신문 한 장

부산 · 1980년 5월

간호사였던 송미경 씨(당시 28세)는 계엄령 기간을 신문 한 장으로 기억한다. 그녀가 일하던 부산의 종합병원 복도에는 항상 그날의 신문이 펼쳐져 있었다.

1980년 5월 21일, 그날의 신문은 1면의 절반이 비어 있었다. 활자가 빠진, 흰 종이의 사각형. 검열의 흔적이었다. 송 씨는 그 빈 공간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고 한다.

“신문이 비어 있다는 게 어떤 건지, 그날 처음 알았어요. 글이 없는 신문은 신문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게 바로 ‘소식’이었어요. ‘비어 있다’가 그날의 소식이었어요. 환자들도 알더라고. 다들 그 빈 사각형을 보고 갔어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앞에서 다들 멈춰서 봤어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다 알았으니까.”

송미경 전직 간호사, 당시 28세 · 2018년 구술 채록

송 씨가 묘사하는 “빈 사각형”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외부 보도의 상태를 정확히 재현한다. 검열은 침묵을 만들고, 침묵은 다시 시민들 사이에서 “읽히는” 형태가 되었다. 빈 공간은 가장 큰 활자였다.

그녀는 이후 30년 가까이 의료 현장에서 일했지만, 그날의 빈 신문 한 장이 자신의 “시민으로서의 첫 번째 깨달음”이었다고 회고한다. 그것은 의료의 영역 바깥에 있는 사회를 처음으로 또렷이 의식하게 된 순간이었다.

제 5 장

아버지의 침묵

전주 · 1980년대

최영진 씨(당시 9세)는 계엄령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침묵”을 통해 계엄령을 살아냈다. 그의 아버지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짧게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회사원이었다.

구금 사유는 끝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동향이 의심스러웠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저 같은 버스에 탔던 사람이 잘못된 책을 읽고 있었을 수도 있다. 풀려난 아버지는 사흘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 집은 그 후로 계엄령 얘기를 안 했어요. 못 한 게 아니고, 안 한 거였어요. 아버지는 평생 그 얘기를 안 하셨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안 하셨고, 나는 자라면서 그 침묵 속에서 자랐어요. 침묵이 가족의 한 일원처럼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어요. 식탁에서 늘 한 자리가 비어 있었어요. 그 자리는 아버지가 풀려난 사흘이었어요.”

최영진 대학교수, 당시 9세 · 2021년 구술 채록

최 씨의 이야기는 계엄령이 1세대를 넘어 2세대, 3세대로 어떻게 전해지는지를 보여준다. 트라우마는 직접 경험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침묵이라는 형태로 가족의 분위기, 식탁의 정서, 가족 안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만든다.

심리학자 김재훈은 이를 “전가된 침묵”이라 부른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자녀 세대가 부모의 침묵을 자기 자신의 정서적 풍경으로 내면화하는 현상이다. 최 씨가 사회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그 침묵에 이름을 붙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 6 장

2024년 12월, 다시

서울 · 2024년 12월

2024년 12월 3일 밤, 한국에서 다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44년 만이었다. 그날 밤 텔레비전 앞에 있었던 김선자 씨(이제 67세)는, 1979년 그 라디오의 밤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라디오가 아니라 휴대전화였다. 알림이 쏟아졌고, 영상이 실시간으로 전송되었으며, 거리에는 시민들이 모였다. 그러나 김 씨가 말하는 “시간이 갑자기 무거워지는 느낌”은 동일했다.

“다시 그날이 올 줄 몰랐어요. 1979년에 22살이었던 내가, 67살이 돼서 또 그 말을 듣게 될 줄. 그런데 이번엔 무서운 것보다 화가 나더라고요. 우리가 이 단어를 다시는 안 듣게 하려고 그렇게 살았는데. 그날 새벽에 잠이 안 와서 거실에 앉아 있었어요. 손녀딸이 깼어요. 손녀가 ‘할머니 무서워’ 하길래, 내가 그랬어요. ‘할머니가 깨어 있을 거야. 할머니는 이 단어를 알아.’”

김선자 제 1 장의 화자, 67세 · 2025년 1월 추가 채록

2024년 12월의 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이 한국 사회에 남긴 흔적은, 짧음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다섯 화자의 증언이 다시 읽힌 것은 그 다음 주의 일이었다.

이 아카이브는 끝나지 않은 채로 남는다. 새로운 증언이 수집될 때마다 갱신되며, 마지막 장은 영원히 다음 장을 위한 자리로 비어 있다. 우리가 이 단어를 다시 듣지 않기를 — 그러나 동시에, 이 단어가 다시 들렸을 때를 위해, 우리는 듣는 법을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