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 possibility
I
시작 — Beginning

한 점에서 뻗어 나가는 무수한 선들이 있다. 어느 것도 아직 그어지지 않았고, 어느 것도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모든 시작은 이런 모양을 하고 있다 — 하나의 점, 그리고 그 점을 둘러싼 가능한 다음들의 희미한 후광.

II
분기 — Branching

길은 우리가 지나간 뒤에 남는 것이다. 가지는 지나가기 전부터 있었고,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 그저 한 쪽만 밟혔을 뿐. (branch, 가지) 라는 낱말은 나무에서도, 수학에서도, 기억에서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III
중첩 — Superposition

한 상자 안에 있는 고양이와, 한 문장이 되기 전의 단어와, 아직 부치지 못한 편지의 다음 문단은 모두 같은 상태에 있다. 그들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superposition) 은 논리의 실패가 아니라, 결정이라는 가위질이 아직 닿지 않은 부드러운 직물이다.

IV
거의 — Almost

어떤 날들은 하마터면 특별할 뻔했다. 어떤 편지들은 전송될 뻔했다. 기울기 직전의 공기에는 아직도 그 방향의 냄새가 남아 있다.

V
일치 — Coincidence

일치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두 개의 독립된 궤도가, 서로를 알지 못한 채, 같은 순간 같은 좌표를 지나갔을 뿐이다. (moiré) — 그 짧은 간섭의 무늬가 남아, 우리는 그것을 의미라 부른다.

VI
간격 — Interval

사건과 사건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폐(肺) 같은 공간이 있다. 그 안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느리게 호흡한다. 너무 빠른 인과는 이 폐를 눌러버린다. 느린 사람만이 그 숨을 듣는다.

VII
잊혀진 — Forgotten

언어의 지도에 올리지 않은 땅은 먼저 잊힌다. 우리가 가능성이라 부르지 않은 것은 밤 사이 조용히 지워진다. 사라진 이름들의 목록은 길다.

VIII
되감기 — Rewind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만, 상상은 강의 양안을 모두 밟는다. 되감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비관이 아니다 — 그것은 재상상이라는 두 번째 강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부드러운 설명이다.

IX
그림자 — Shadow

일어난 일의 그림자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의 그림자가 더 길다. 말하지 못한 문장은 그 집의 모든 벽을 따라 서서히 움직인다. 그림자는 빛의 부재가 아니다 — 그것은 다른 시간의 발자국이다.

X
계속 — Continuing

마침표가 없는 이 마지막 문장은 일부러 마치지 않은 것이다. 가능성에 관한 글은 끝날 수 없다 — 끝난 순간 그것은 이미 하나의 결정이 되고, 결정된 것은 더 이상 가능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문장 한가운데에서 헤어진다